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레이트 게임 (문단 편집) == 영국과 러시아의 격차 == 러시아 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통치하는 나라였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유럽의 경찰 국가 비슷한 위상까지 얻었지만 대영제국에 비하면 속 빈 강정이었다. 더불어 당시의 대영제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최전성기를 달리던 황금기였다. 애초에 좋게 말해야 영-러 패권경쟁이지 실질적으로 따지면 영국은 러시아에 대해서 일방적인 우위에 있었다. * '''[[산업 혁명]]을 연달아 주도하던 나라가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증기선]], [[철도]], [[전기]] 등 여러 공학 및 산업 기술 면에서 최선두를 달리던 국가였고 러시아는 기술 발전이 크게 정체된 국가였다. 당연히 이러다 보니 전반적인 군사력 면에서 여러 가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전 유럽을 상대해도 충분한 수준의 군 병력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광활하고 넓은 영토 특성상 도로와 같은 인프라의 건설은 부진했고 각지에 분산되었던 군사력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었다. 반면 영국은 '''세계 최초로 군용 철도를 부설해'''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었으며 기본 화기도 [[미니에 탄]]과 강선 머스킷총으로 무장했으므로 아직도 활강식 머스킷을 운용하던 러시아군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당연히 대포의 사정거리도 강철 대포로 무장한 영국이 청동 대포로 무장한 러시아보다 우위였다. 거기다가 의료체계의 혁신을 통해 러시아군보다 전염병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 '''영국은 세계 1위 해군국이었다.''' 섬나라라는 영국의 특성상 국가안보에 있어서 해군의 중요성은 가장 컸고 자연스럽게 해군력이 발달해 있었다. 당대는 광대한 식민지에서 발생하는 풍족한 자원들을 전부 무역 항로를 통해 받아야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할 수 있는 막강한 해군은 필수적이었는데 영국의 높은 해군력 비중은 이러한 시대와 잘 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회 차원에서 막강한 해군력 투자를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선박 관련 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에 100년 이상 동안 해군으로 도전하는 상대가 없었을 정도로 양과 질 모두 세계 최강의 해군으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반면 러시아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농경지에서 벌어지는 반란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거대한 육군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조건은 러시아가 해군력에 집중 투자할 수 없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거기다가 느린 경제, 산업 발전력 때문에 러시아는 영국에 필적하는 해군력을 육성할 수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해군은 그렇다 쳐도 쓸만한 항구조차 별로 없어 [[부동항]], 부동항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 러시아의 뒤처지는 사회 시스템은 영국과의 경쟁에서 더더욱 뒤처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여전히 귀족들이 주요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국가였고 자연스럽게 산업 발전은 느려질 수밖에 없었으며 아직도 [[농노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지주들이 농노들의 생산력을 착취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업 생산력은 서유럽과 비교해 현저히 낮은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인구가 농노다 보니 산업 생산에 동원될 수 없어서 러시아 산업 증가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농노제로 착취당하는 러시아인 대다수의 교육 수준도 '''[[문해력|대부분의 인구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영국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산업 혁명을 통해 중산층이 발전되고 연달아 사회 혁명을 시도하는 영국과 크게 대비되는 양상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발전을 크게 옥죄는 농노제를 폐지했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 농민의 권리와 부는 크게 제약되어 서구보다 노동력 동원면에서도 크게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 영국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국민들이 선출하는 입법부, 입법부에서 선출된 내각이 국가의 주요 정사에 관해 의사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민주주의|여러 명의 의사결정권자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의사소통을 진행해 정책을 결정할 수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황제]]에게 [[전제군주제|모든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고]]''' 의사결정권이 극소수에 밀집된 러시아 제국의 의사결정력도 당연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보니 통치력이 부족한 황제가 권력을 잡을 경우 문제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니콜라이 2세]] 시절에 '''[[러시아 혁명|국가 자체가 붕괴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 [[알렉산드르 3세]]가 '러시아의 동맹은 단 둘, 우리의 육군과 해군뿐이다.'라고 말했듯이 러시아는 이미 외교적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19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이어서 유럽 세계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제 아무리 역사적으로 [[영불관계|영국과 다툰 역사적 경험이 많은]] 프랑스도 러시아의 해양 진출 견제를 위해선 영국과 협력하고 [[크림 전쟁]]에선 군대까지 보내 도와줄 정도니 말 다했다. 이외에도 영국은 [[일본 제국]]에도 접근해 영일동맹을 맺은 뒤 일본에게 수많은 지원을 했으며 이러한 지원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아이러니하게 일본 제국의 성장은 2차 대전에서 [[말레이 해전]], [[자바 해전]], [[실론 해전]]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재해권 상실과 대영제국 해체에 영향을 끼쳤다.] 그나마 1872년 [[삼제동맹]]의 결성으로 외교관계가 약간 개선되긴 했지만 순전히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의 대전략에 러시아가 업혀간 수준이었고 실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발칸을 두고 [[범슬라브주의]]에 기반한 강대강 대치를 지속하다가 15년 만에 동맹이 깨졌다.(...)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가 고립시켰던 [[러불동맹|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된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